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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 2023년 8월 27일 /

속도의 함정: '빅테크는 왜 이렇게 느려요?'

빅테크의 느림 속에 숨겨진 거대한 스케일과 임팩트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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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를 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마주치는 글들이 있다. "버튼 하나 바꾸는 데 수개월이 걸린다"며 대기업이나 빅테크의 느린 속도를 비꼬는 트윗들이다. 그런 글들을 볼 때마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린다.

"Your eyes cannot see what you do not know." (아는 만큼만 보인다.)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답답한 관료주의로 보일지 모르는 그 '느림'의 이면에는, 그들이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거대한 세계가 존재한다.

불안이라는 이름의 동력

빅테크의 느림을 비판하는 이들은 주로 빠른 실행력을 무기로 삼는 스타트업 종사자들이다. 물론 속도는 스타트업의 가장 큰 무기다. 하지만 그 속도가 어디서 기인하는지 냉정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 속도는 혁신을 위한 열정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구조적으로는 '생존에 대한 공포''부족한 직업 안정성'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심리적 안전(Psychological Safety) 없이 개인의 온전한 성장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성공 여부가 극도로 불확실한 상황에서 밤낮없이 '그라인드(Grind, 목적 없는 단순 반복 노동이나 맹목적 헌신)'만 반복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과연 그 바쁨 속에서 자신의 커리어나 스킬셋을 넓힐 여유가 있는가?

그 그라인드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IPO 대박? 설령 그렇다 한들, 당신의 지분은 그간의 고통을 보상할 만큼 충분한가?

지금 당장 바쁘기 때문에 바쁜 것은 아닌지, 한 걸음 물러서서 자신을 둘러봐야 한다. 회사의 생존을 위한 맹목적인 희생을 자신의 내적 성장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준비되지 않은 시스템의 비극

초기 스타트업이 가진 또 하나의 구조적인 문제는 미성숙한 조직 체계다. 준비된 사람이 그에 걸맞은 자리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당장의 필요에 의해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 빈자리를 채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속적인 성과"를 모니터링할 여유도 체계도 없기에, 그저 '잘할 것 같은 사람'에게 역할을 맡기고 개인의 잠재력에 온전히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재앙이 되기도 한다. 조직을 망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리더나 매니저의 자리를 맡기는 것이다. 실제로 지인이 작은 스타트업의 CTO로 일하고 있는데, 그의 가장 큰 고민은 리더십에 대해 조언을 구할 선배가 사내에 전무하다는 점이다. 함께 일하는 CEO조차 그에게 답을 줄 수 없다며 오히려 내게 가끔 조언을 구하는 것이 현실이다.

C레벨 임원들은 외부 컨설팅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그 아래 중간 관리자나 주니어 개발자들은 그럴 기회조차 없다. 그저 지표(Metric)와 KPI를 향한 무한한 그라인드와, 매주 쏟아지는 새 기능(Feature) 런치를 위한 아수라장이 있을 뿐이다. 당신이 만약 이런 환경에 놓여 있다면, 냉정하게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현재의 리더들이 당신의 장기적인 커리어 로드맵을 함께 그려줄 수 있는 충분한 경험을 먼저 쌓았는가? 자신이 가보지 않은 길을 남에게 안내할 수는 없는 법이다.

느림의 미학: 스케일과 임팩트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빅테크가 일하기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일까? 단순히 높은 연봉이나 무료 점심 때문만은 아니다.

첫째, 심리적 안전이다. 당장의 생존 위협이 제거된 환경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더 존중하고 친절하게 소통할 수 있다. 사려 깊은 매니지먼트는 구성원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둘째, '느림'의 진짜 이유인 압도적인 스케일과 임팩트 때문이다. 빅테크에서 작은 변화 하나를 만들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그 변화가 가져올 파급력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웹페이지에서 광고 위치를 몇 픽셀만 옮겨도 매출의 단위가 달라지고, 버튼 하나의 동작 방식이 전 세계 수억 명의 사용자 경험을 송두리째 바꾼다.

이러한 스케일 아래에서는 엔지니어링 및 프로덕트 결정이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충분한 고민과 검증 없는 출시는 사회경제적으로 엄청난 후폭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느리다고 비웃는 것은, 냉정히 말해 그런 규모의 스케일과 임팩트를 아직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쁨을 위한 바쁨을 경계하며

물론 조직이 커지면 관료주의와 프로세스는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이는 필요악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스템들이 사람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에 대응하는 수단이 '사람 중심의 사려 깊은 조직 문화'이고, 이를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것이 바로 매니지먼트와 리더십의 역할이다.

대부분의 오해와 몰이해는 서로 다른 입장에서 생겨난다.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상황을 쉽게 비난하기보다는, 빅테크 회사들이 왜 그런 프로세스들을 갖게 되었는지 한 번쯤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거기엔 본인이 알지 못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높고, 분명히 배울 점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중한 느림이 아니라, 관료주의와 시스템이 낳은 바쁨을 위한 바쁨일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빠른 속도가 능사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프로덕트의 스케일과 임팩트에 대한 사려 깊음의 유무다.

당신이 피쳐를 번개처럼 출시할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프로덕트의 영향력이 아직 미미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동안 실리콘밸리의 쿨한 모토처럼 여겨졌던 "Break things and move fast". 정말 쿨하게 들리지만, 그 파괴적인 속도가 과연 우리 사회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는지, 이제는 한 번쯤 멈춰 서서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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