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 통역기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팩트를 건져 올리는 프레임워크
* 본문에 등장하는 사례는 여러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입니다.

드라마없는 오피스는 없다
대나무 숲인가, 트러블슈팅인가
어느 나른한 오후, 화상 회의실에 입장하자마자 공기가 무겁다. 화면 너머 팀원의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고, 억지로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입가에는 미세한 떨림이 감지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감정의 소용돌이가 치고 올라오고 있음이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그 사람과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 프로젝트에서 빠지고 싶어요..."
예상대로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한풀이는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진다. 매니저로서 팀원의 고충을 들어주는 것은 가장 중요한 책임 중 하나다. 때로는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되기에, 일단은 충분히 감정을 쏟아낼 시간을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보통 30분 남짓이다. 미팅 시간이 절반 정도 남은 즈음 결정을 내려야 한다.
"오늘의 1:1은 감정을 받아내는 '대나무 숲'인가, 아니면 문제를 해결하는 '트러블슈팅'인가?"
만약 전자로 결론 내렸다면, 공감하고 위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팀원이 계속되는 갈등 상황을 문제로 보고 해결을 원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때 매니저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객관적인 팩트를 발라내는 '통역사'가 되어야 한다. 이 얽히고설킨 갈등의 실타래를 어떻게 빠르게 풀 수 있을까?
SBI 프레임워크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둘러싼 "네 말 내 말"들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자신의 일에는 누구나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때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발짝 물러나, 마치 제3자가 CCTV를 판독하듯 냉정하게 갈등을 해체할 때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바로 SBI 프레임워크다.

갈등을 이 세 가지의 레이어로 분해해내는 일은 직장 내 갈등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미세한 마찰을 풀어내는 데에도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다. 가족 혹은 친구 간의 다툼을 예로 들면, "너는 내 말은 듣지를 않아!"라고 쏘아붙이는 대신, 이 프레임워크를 통과시키면 이렇게 번역된다.
"어제 저녁 먹을때(상황), 내가 말할 때 네가 세 번이나 말을 끊고 핸드폰만 보더라(행동). 그래서 내 말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많이 상했어(영향)."
이쯤에서 눈치 빠른 분들은 알아챘겠지만, 이 프레임워크의 결과물에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요구는 없다. "그래서 니 잘못이야"가 아니라 "내 기분이 상했어"가 메시지의 핵심이다. 이것은 상대를 비난하고 이겨서 대화를 끝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문제점을 함께 이야기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대화의 문을 여는 도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감정 속에서 팩트 찾기
다시 화상 회의실로 돌아와 팀원이 쏟아낸 토로를 정리해본다.
30분간 팽팽한 감정의 덩어리를 듣고 나면 당장 해줄 수 있는 건 위로뿐인 듯하다. 무엇이 팩트이고, 누가 무슨 행동을 했으며, 어떤 결과가 발생했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릿속에 빙빙 도는 말들을 SBI라는 프리즘에 통과시켜 살펴보면 감정의 안개는 좀 더 걷혀나간다.
상황: 두 팀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서, 두 사람이 각 팀을 대표해 수개월째 협업을 해왔음.
- "상황"은 객관적일 수밖에 없다. 벌어진 상황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황에 대한 개인의 의견을 피력하거나 해석을 덧붙인다면 객관성을 잃게 된다.
행동: 빠른 진행을 위해 다른 팀의 팀원이 특정 절차를 무시할 것을 요구했으며, 협업 기간 내내 코드 리뷰 및 공유문서에서 무시 및 폄하하는 언행과 태도를 보임.
- "행동"은 상황 안에 등장하는 당사자들의 행위에 대한 면밀한 관찰이다. 이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구성되어야 그 가치가 있다. 실제로 검증된 근거가 존재하는 사실만 포함시키고, 감정적, 주관적 해석은 배제되어야 한다.
영향: 우리 팀원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퇴사까지 고려 중이며, 현재 양 팀의 협업 기능 상실로 프로덕트 출시 일정의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짐.
- "영향"에서는 위의 행동 때문에 발생한 개인 혹은 조직의 피해에 대해 서술한다. 주관적 감정이나 비즈니스적 파급력은 해석하기 나름이라 여길 수 있지만, '상대방의 행동으로 인해 우리 팀원이 업무 의욕을 상실했다는 것' 자체는 핵심 논제로 다뤄져야 한다.
이렇게 정제된 상황, 행동, 영향은 양 팀의 매니저들 사이에 공유되고 교정을 거쳐 최종 해결책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 프레임워크가 누군가를 방어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비즈니스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행동 패턴'을 찾아내고 바로잡기 위해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드라마 없는 엔딩
조직 내 갈등이 한 편의 휴먼 드라마처럼 눈물겨운 화해로 봉합되는 일은 드물다. 이 사태의 결말 역시 서로를 껴안고 끝나는 극적인 해피엔딩은 아니었다.
갈등의 당사자들은 각자의 본래 역할로 돌아가 거리를 두었고, 직접적인 마찰의 여지는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통해 분리되었다. 누군가가 나서서 악당을 무찌르고 구원하는 식의 영웅주의적 담판은 없었다. 그저 '객관적인 도구'가 갈등의 벽을 허물고 팩트를 직시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후 해당 팀원의 1:1 미팅에서는 흥미로운 변화가 엿보였다. 그 팀원은 SBI 프레임워크를 통해 분노와 억울함에 매몰되어 있던 자신을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게 되었다고 했다. 갈등 상황을 맞닥뜨려도 무력하게 휩쓸리지 않고, "이 상황(S)에서 저 행동(B)이 나에게 어떤 영향(I)을 미치고 있는가?"를 스스로 묻는 단단함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이전에는 무례한 태도 앞에서 쉽게 흔들리거나 감정적으로 되받아 쳤다면, 이제는 상대의 행동과 자신의 감정을 분리해서 대처하는 여유를 보였다.
만병통치약이 아닌 나침반
우리가 이 프레임워크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것이 갈등 해소를 위한 만병통치약이라서가 아니다. 당사자들이 인내심을 갖고 대처하거나 시간이 충분히 흐르면 웬만한 갈등은 자연스럽게 소멸하기 마련이다. 필자는 이 방법이 주는 가장 큰 가치는 불필요한 감정 소비와 기회비용을 줄여준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어떡해야 하지?" 하는 막막함 속에 며칠을 속 끓이며 방황하기보다, 정해진 틀에 맞춰 기계적으로 상황을 분해하다 보면 감정에 가려져 있던 본질이 의외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나아가 "니말 내말" 식의 소모적인 공방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SBI를 거쳐 정제된 내용들은 문제 해결을 향한 대화의 나침반이 되어준다.
이 나침반에 익숙해진다면 직장 내의 팽팽한 신경전은 물론, 일상 속의 크고 작은 오해 앞에서도 한결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감정의 파도 속에서도 팩트라는 단단한 땅을 디디고 서서, 상대를 향해 칼날을 겨누기보다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 나 자신과 우리의 관계를 보호하는 가장 정교하고 다정한 통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