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재능 사이
열여덟, 새로운 출발선에 선 아들을 위한 편지

새로운 출발선에 서서
아들 J에게.
낯선 기숙사 방에 무거운 트렁크를 내려놓고, 공항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 조금은 긴장된 표정으로 손을 흔들던 너의 어색한 미소가, 돌아가는 길 내내 눈에 어찌나 밟히던지. 텅 빈 옆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꼭 네게 건네고 싶었던 생각들을 한번 적어보기로 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한 1년쯤 지났을까. 아빠가 20대 초반에 한 차례 크게 실패했던 음악을 다시 한번 시작해 보겠다고, 작은 방구석에서 악기와 컴퓨터를 붙잡고 씨름하던 시절이 있었어.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인터넷에 음악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강의 영상을 찍어 올리기 시작했지. (유튜브도 없었던 그때에) 그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순수한 의도였는데, 모니터 너머에서 돌아온 반응은 상상 이상으로 폭발적이었어.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인정과 찬사가 쏟아졌어.
하지만 사람들의 박수가 뜨거워질수록, 아빠의 마음은 점점 더 흔들렸다.
"내가 과연 음악을 계속하는 것이 맞는 걸까? 아니면 사람들이 이렇게 인정해주는 '가르치는 일'로 내 길을 바꾸는 것이 맞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두 가지 모두를 어떻게든 품고 가야 하는 걸까?"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을 할 때 느끼는 '행복감'과, 내가 가진 재능을 통해 세상의 인정을 받을 때 느끼는 '성취감'. 이 두 가지가 왜 한 몸처럼 붙어 있지 않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를 잡아끄는지, 그 시절의 나로서는 도무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
사랑하는 음악에 온전히 시간을 쏟지 못할 때 밀려오는 깊은 상실감, 그리고 내가 가진 시간과 능력이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찾아오던 공허함.
당연하게도 세상은 내가 명쾌한 답을 내릴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고, 어느덧 많은 계절이 흘러 아빠는 50이 되었지만, 아직도 완벽한 정답 같은 건 내 손에 없는 듯하구나.
다만 한 가지 깨달은 것은 하나의 완벽한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때의 스물다섯 살의 내가 이 단순한 진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 수많은 밤을 자책과 불안으로 지새우지는 않았을 텐데.
너도 아마 인터넷이나 책에서 한 번쯤 봤을지도 모르겠어. 이키가이(生き甲斐, "a reason for being")라는 유명한 개념 말이야. 삶의 보람이나 존재 이유를 뜻하는 일본말인데, 사람들에게는 이게 네 개의 원으로 그려진 벤 다이어그램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이키가이(生き甲斐, the reason for being)
- 내가 사랑하는 것 (What you love)
- 내가 잘하는 것 (What you are good at)
-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 (What the world needs)
-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것 (What you can get paid for)
이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는 꽤 단순하고 명쾌하지? 이 네 개의 원이 겹쳐지는 교집합을 찾아야만 비로소 흔들림 없는 성공적인 삶을 이룰 수 있다는 것. 내 안의 열정, 타고난 재능, 그리고 세상의 쓰임새와 경제적 보상이 잘 맞아떨어지는 마법 같은 그 중심점을 찾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것.
그리고 이 네 가지 질문은 아주 훌륭한 '나침반' 역할을 해주기도 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에너지를 쏟아야 할 올바른 방향을 보여주거든. 만약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 네 가지 기준 중 단 하나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면, 내가 왜 그곳에 소중한 시간을 쓰고 있는 건지 곰곰이 돌아보고 다시 생각해 봐야 해. 타성이나 남들의 기대에 떠밀려 삶을 낭비하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는 좋은 필터인 셈이지.
하지만 아빠는 이 개념이 단순한 그림으로 설명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해. 우리의 인생은 2차원 평면에 그려진 그림처럼 정지해 있지 않고 시간이라는 강물 위를 흘러가는 여정이기에, 이 네 가지 요소 또한 인생의 계절이 바뀌듯 차례차례 찾아온다는 것을.
그래서 이 네 가지 질문이 던져져야 할 인생의 계절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예를 들면, 지금 초등학생 아이에게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이나 "돈 벌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는 건 참 어색하겠지? 마찬가지로 60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당신의 숨은 재능을 찾으세요"라고 하는 것도 난감한 것처럼 말이야.
그렇다면 이제 막 성인의 문턱을 넘어 낯선 대학 캠퍼스에 선 너는, 지금 이 네 가지 계절 중 과연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여기서부터는 아마 다른 책이나 인터넷 어디에서도 읽을 수 없는, 온전히 아빠만의 생각이야.
유치원 시절부터 앞으로 대학 4년까지를 인생에서의 계절로 본다면, 이 시간 동안 아빠가 너에게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야.
바로 내가 사랑하는 것과 내가 잘하는 것, 이 내면의 두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일에만 너의 모든 에너지를 온전히 쏟아달라는 것.
아빠는 이 두 질문에 대한 제대로 된 고민도 해보기 전에, 조급한 불안에 쫓겨 유명세(3번)와 부(4번)로 냅다 뛰어든 이들을 꽤 많이 보았거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성급한 선택에는 반드시 가혹한 대가가 뒤따르는 것 같더구나.
우리를 하루하루 숨 쉬게 만드는 행복은 내가 사랑하는 일에서 오고, 나를 세상 앞에 당당히 세우는 자존감은 내가 잘하는 일에서 피어나는 법. 이 두 개의 주춧돌이 부실한 상태에서 세상의 유명세와 경제적 보상에만 매달리다 보면, 겉으로는 번듯한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여도 결국 마흔과 쉰을 넘어서며 공허함과 상실감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꽤 있더구나.
그러니 대학에 머무는 시간만큼은 세상의 조급한 눈치를 보지 말고, 오직 내가 사랑하는 것과 내가 잘하는 것에 너의 온 마음을 집중해봤으면 해. '나라는 인간은 대체 어떤 결을 가진 존재인가'를 찾아가는 모험에 너의 젊음을 아낌없이 쓰라는 말이야.
아티스트와 디자이너의 길을 걷겠다는 너에게, 내가 사랑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마냥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을 거야. 때로는 하얀 스케치북이나 텅 빈 모니터 앞에 홀로 앉아 "내가 과연 재능이 있기는 한 걸까? 내가 품은 열정이 그저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할 때도 있을 거야. 마치 아빠 역시 20대의 방구석에서 똑같은 어둠을 지나왔던 것처럼.
그럴 때 기억해야 할 것은 열정과 재능은 날 때부터 완벽하게 결합되어 있는 기성품이 아니라는 거야. 어떤 수업을 들을 때, 너 자신을 주저 없이 그 과목에 던져보고, 밤을 새워 하나의 과제에 매달려보고, 마침내 학기가 끝났을 때 되돌아보고 성찰해보는 거야.
"모든 걸 쏟아부었지만, 가슴이 뛰지 않는 걸 보니 이건 내가 평생 할 일은 아니겠구나."
"이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새울 수 있을 만큼 내가 좋아하는 일이구나."
"내가 몰랐던 나만의 감각을 발견할 수 있는 수업이었구나."
학점이라는 숫자는 그 치열한 몰입 끝에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부산물(byproduct)에 불과함을 잊지 말기를. 오히려 A라는 완벽한 성적표를 받아 들고서도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했다면, 그것이야말로 귀한 시간을 낭비한 것일지도 몰라.
사실 이 편지를 써내려 가면서 너에게 해주고 싶은 잔소리가 참 많더라고. (아빠가 참 잔소리가 많은 사람이잖아?) 훌륭한 멘토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인공지능의 파도 속에서 예술가의 고유성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 수업을 들을 때는 늘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는지 같은 것들. 하지만 네가 없는 텅 빈 자리를 바라보다 문득 든 생각은, 그런 이야기들은 결국 작은 조약돌에 불과하다는 것. 그런 이야기들은 앞으로 네가 대학 생활을 해나가며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조금씩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
진짜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스스로를 찾아가는 데 쉼 없이 노력을 기울이는 것, 그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 자체가 목표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어. 앞으로 마주할 4년의 시간 동안, 이 생각이 너를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여정 그 어디에서라도, 아빠는 늘 네 곁에 있을게.
대학교 학부 4년의 시간은, 어쩌면 네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눈부시게 즐겁고 행복한 시절이 될지도 몰라. 친구들하고 신나게 놀아보는 것도 결코 잊지 말고! 그래서 훗날 이때를 돌아보았을 때, "아, 그때 정말 좋았지"라며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바란다.
새로운 세상으로 첫발을 내딛는 너의 모든 날들을 응원한다!
2026년 9월 6일,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아빠가.
이 포스트의 생각과 의견은 개인적인 견해이며, 제가 소속된 회사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나누고 싶은 피드백이 있으신가요? 여기에 메시지를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