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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 2026년 9월 6일 /

열정과 재능 사이

열여덟, 새로운 출발선에 선 아들을 위한 편지

#이키가이 #자기발견 #진로

새로운 출발선에 서서

새로운 출발선에 서서

아들 J에게.

기숙사에 너를 내려두고 혼자 돌아오는 길, 문득 네게 꼭 건네고 싶었던 생각들을 몇 자 적어본다.

군대를 제대하고 한 1년쯤 지났을까? 아빠가 20대 초반에 한 차례 크게 실패했던 음악을 다시 한 번 시작해 보겠다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며 소통을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어.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인터넷에 동영상 강의라는 것을 찍어 올리기 시작했지. 그저 내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내 경험과 지식을 나누어 보려는 시도였는데, 그때 반응이 너무 폭발적이어서 나 스스로도 무척 놀랐어. 모니터 너머의 수많은 사람들이 내 강의를 좋아해 주었고, 태어나 경험해 본 적 없는 호응을 느낄 수 있었어.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워질수록 아빠는 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어.

"내가 과연 음악을 계속하는 것이 맞는 걸까? 아니면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해 주는 '가르치는 일'에 더 집중하는 것이 맞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두 가지 다 미친 듯이 열심히 해봐야 하는 걸까?"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을 할 때 느끼는 '행복감'과, 내가 잘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 느끼는 '성취감'이 - 이 두 가지가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 그 당시의 나로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 음악을 하지 못하고 가르치는 일에 시간을 뺏기면서 느끼는 상실감. 그리고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음을 체감하며 내 능력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 공허함.

물론 세상은 내가 완벽한 답을 낼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많은 시간이 흘러 아빠는 이제 50이라는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도 정답을 갖고 있진 않아. 하지만 하나 깨닫게 된 것은 완벽한 답이라는 건 어디에도 없다는 거야. 그때의 내가 이걸 미리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너도 아마 인터넷이나 책에서 한 번쯤 봤을지도 모르겠어. 이키가이(生き甲斐, "a reason for being")라는 유명한 개념 말이야. 삶의 보람이나 존재 이유를 뜻하는 일본 말인데, 서양에서는 이게 4개의 원으로 그려진 벤 다이어그램으로 널리 알려졌지.

이키가이 다이어그램

Ikigai (Wikimedia Commons)

  1. 내가 사랑하는 것 (What you love)
  2. 내가 잘하는 것 (What you are good at)
  3.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 (What the world needs)
  4.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것 (What you can get paid for)

이 개념이 말하려는 핵심은 이 네 개의 원이 만나는 정중앙의 교집합을 찾아야 비로소 의미 있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거야. 내 열정과 재능, 세상의 쓸모와 경제적 보상이 딱 맞아떨어지는 그 지점 말이지.

얼핏 드러나 보이진 않지만, 이 네 가지 기준은 아주 훌륭한 '나침반' 역할을 해주기도 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에너지를 쏟아야 할 올바른 방향을 일러주거든.

만약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 네 가지 기준 단 하나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면, 내가 왜 그곳에 소중한 시간을 쓰고 있는 건지 곰곰이 돌아보고 다시 생각해 봐야 해. 타성이나 남들의 기대에 떠밀려 삶을 낭비하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는 좋은 필터인 셈이야.

하지만 아빠는 이 다이어그램이 그려진 모습, 즉 평면적인 형태 자체에 아주 중요한 맹점이 하나 숨어 있다고 생각해.

우리의 인생은 한순간에 정지해 있는 평면이 아니라, 시간의 축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선형(Linear) 모델이거든. 그래서 이 네 가지 요소는 한 장의 그림처럼 동시에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차례차례 마주하게 되는 '연속된 단계(Phase)'의 형태로 찾아오게 된다고 생각해. 예를 들면, 지금 초등학생이 된 아이에게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이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을 묻는다는 건 좀 어색하겠지?

그렇다면 이제 막 성인이 되어 대학이라는 새로운 문턱에 선 너는, 지금 이 네 가지 페이즈 중에서 과연 어디쯤 서 있는 걸까?


여기서부터는 아마 다른 책이나 인터넷 어디에서도 읽을 수 없는, 온전히 아빠만의 생각이야.

유치원 시절부터 앞으로 마주할 대학 4년까지를 하나의 긴 배움의 시간으로 본다면, 이 기간 동안 아빠가 너에게 개인적으로 바라는 건 딱 하나뿐이야. 바로 첫 번째(내가 사랑하는 것)두 번째(내가 잘하는 것), 이 두 가지에만 온전히 집중해 달라는 것.

아빠는 이 1번과 2번이 채워지기도 전에 조급한 마음에 3번(세상이 원하는 것)과 4번(돈을 벌 수 있는 것)으로 먼저 뛰어든 사람들을 주변에서 꽤 보았어. 하지만 그런 판단에는 무시할 수 없는 대가가 기다리고 있어. 결국 나에게 '행복감'을 주는 건 내가 사랑하는 일이고, 또한 내게 '성취감'을 주는 건 내가 잘하는 일인데, 이 내면의 두 기둥이 부실한 상태에서 세상의 요구와 돈에만 매달리다 보면 어떻게 될까?

겉으로는 번듯하게 성공한 것처럼 보여도, 깊은 상실감과 혼란 속에서 방황하는 경우를 아빠는 정말 많이 봐왔어.

비록 너는 이제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성인이 되었지만, 아빠는 그렇다고 해서 벌써부터 너에게 그 많은 무거운 짐들을 지게 하고 싶진 않아. 그 마감선을 조금 더 뒤로 밀어주는 것이 아빠로서 너에게 줄 수 있는 좋은 선물일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지금만큼은 조금 더 이기적인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어. 오직 1번과 2번에 너의 모든 영혼과 마음을 집중하고, '너라는 인간이 과연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에 시간을 아낌없이 써보면 어떨까?

하지만 이 과정이 지나치게 거창할 필요는 없어. 학교에서 이런저런 수업을 들을 때마다, 그 과목이 주는 가르침에 너 자신을 완전히 던져서 몰입해 보는 거야. 그래서 학기가 끝났을 때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해보는 거지.

"아, 후회 없이 미친 듯이 한번 해봤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일은 아닌 것 같아."
"어, 이거 정말 내 마음에 쏙 드네."
"어, 이 분야는 나한테 확실히 소질이 있구나."

적어도 어떤 과목을 끝마쳤을 때, 그 분야가 1번과 2번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명확하게 얻을 수 있을 만큼 최선만 다해준다면 아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 그렇게 온 마음으로 너 자신을 던지다 보면, 그 과목에서의 학점이라는 것은 굳이 집착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부산물일 뿐이야. 오히려 A라는 학점을 받고서도 중요한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면, 그게 더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사실 이 편지를 너를 위해 쓰기 시작하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고, 노트에도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적어두었어. 좋은 멘토를 많이 만나라, 수업을 들을 때는 항상 '왜'라는 질문을 던져라, 혹은 AI 시대에 아티스트로서 너만의 고유함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해라, 같은 것들.

하지만 한 발짝 물러서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런 것들은 결국 디테일에 지나지 않더라고. 그런 이야기들은 앞으로 네가 대학 생활을 하면서 아빠에게 조언을 구할 때마다, 언제든 조금씩 나누어 줄 수 있는 것들이니까.

진짜 중요한 것은 - 네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네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디자이너, 아티스트로서의 너 자신을 찾아가는 것.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네 온 마음을 쏟아붓는 것. 아빠가 너에게 온전히 집중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건 오직 그것 하나뿐이야.

그렇다고 해서 목숨을 걸고 평생 지켜야 할 완벽한 정답을 꼭 찾아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야. 완벽한 해답이라는 건 애초에 어디에도 없으니까. 네가 너 자신에게 집중해 가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고, 온 힘을 다해 어떤 한 가지 과제와 주제에 너 자신을 푹 빠뜨려 보는 경험을 해보라는 거야. 앞으로 맞이할 4년의 시간 동안, 이 생각이 너를 지탱하는 든든한 원칙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는 길목 그 어디에서라도, 아빠는 늘 너의 곁에 있을 거야.


대학교 학부 4년의 시간은, 어쩌면 네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눈부시게 즐겁고 행복한 시절이 될지도 몰라. 그렇기 때문에 아빠는 이제 막 새로운 성인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너의 출발을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할게.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네 한계를 시험하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만큼이나 하루하루를 누리고 즐겼으면 좋겠어.

친구들하고 미친 듯이 놀아보는 것도 잊지 말고!

그래서 훗날 이때를 돌아보았을 때, "아, 그때 정말 좋았지"라고 기쁨을 네 가슴속 깊이 느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랄게.


2026년 9월 6일, Boston Logan 공항에서.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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