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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 2026년 5월 13일 /

구글에서의 10년, 그리고 미지의 10년

파괴된 낡은 공식, 그리고 불안한 설렘

#커리어 #구글 #AI #리더십

무용지물이 된 2년 전의 초안

2024년, 구글에 몸담은 지 10년을 맞아 기획했던 이 포스트 시리즈의 원래 목표는 단순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점진적인 성장을 4개의 단계로 그려내는 것이었다. 뛰어난 코딩 실력과 오너십으로 증명하는 'Making it Work', 팀과 프로세스를 조율하는 'Making it Flow', 파트너 생태계 속에서 공생하는 'Making it Together', 그리고 세상에 진정한 가치를 더하는 'Making it Matter'까지. 엔지니어 1인이 임팩트의 규모를 키워가며 성장하는 4개의 동심원이 이 초안의 뼈대였다. 이를 바탕으로 앞선 9개의 포스트를 연재하며 지난 10년의 조각들을 엮어낼 수 있었다.

4개의 동심원

4개의 동심원

하지만 대미를 장식할 10번째 포스트를 쓰기 위해 2년 만에 다시 꺼내 본 이 설계도는 이미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AI라는 거대한 파도가 덮친 지금의 현실과는 도저히 연결 지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과 팀의 정의부터 뒤집히고 있으며, 생태계라는 거창한 단어는 생존의 위협 앞에 흩어지고 있다. 그 누구도 변화의 명확한 방향을 알지 못하는 혼란 속에서, 엔지니어들이 과거 선배들의 점진적인 성장 곡선을 그대로 밟아가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나는 기존의 마인드맵을 예쁘게 포장하여 글을 마무리하는 것을 과감히 포기했다. 대신 원점으로 돌아가 이 4개의 단계를 새롭게 재정의해 보기로 했다. 지난 10년을 정리하려던 이 글은, 다가올 미지의 10년을 예측하는 단상이 될 것이다.

동심원 1 "Making it work": 개인의 역할

과거 시니어급 IC(Individual Contributor)에게 기대하는 이상적인 롤모델은 명확했다. 스스로 문제의 본질을 정의하고 정해진 타임라인 안에 고품질의 결과물을 뽑아내는 독자적인 오너십이었다. 결국 '코드와 기술 문서의 질과 양'이 실력을 증명하는 절대적인 척도였다.

하지만 AI 시스템이 급속도로 전파되면서 이 견고했던 기준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다. 웬만한 주니어들도 AI 도구를 잘 쓰기만 하면 그럴싸한 결과물을 순식간에 양산해 내며 업계 전체의 '바닥'을 무섭게 끌어올리고 있다. 기계적 속도와 양이 평준화된 지금, 엔지니어 개인의 업스킬링은 도대체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미래의 척도는 단순히 '얼마나 훌륭하게 코딩을 해냈는가'에 머물지 않는다. '어떠한(What) 일을 왜(Why) 했는가'를 훨씬 더 집요하게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과거 매니저나 리더십에게 요구되던 거시적인 시야가 개별 엔지니어를 평가하는 기본 척도로 내려왔다. 개개인의 감각(Taste), 의도성(Intentionality), 그리고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야말로 이제 엔지니어의 가장 치명적인 무기가 되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바로 이전 포스트인 <AI가 끌어올린 바닥, 우리의 천장은 어디인가>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기술적 기본기를 내던져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기본기 위에 '가치를 판별하는 감각'과 '주도성(Agency)'까지 얹어야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코딩을 넘어 PM처럼 사고하고 나아가 1인 기업 수준의 기업가 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가 - 이것이 미지의 10년이 던지는 첫 번째 도전이다.

동심원 2 "Making it Flow": 팀과 프로세스의 재정의

이전 포스트들에서 나는 "갈등 통역기""지속 가능한 퍼포먼스" 등의 개념을 통해, 시스템을 구축하여 실수를 줄이고 성과를 내는 커뮤니케이션 프로세스의 중요성을 다루었다.

하지만 그 "어쩔 수가 없다"고 여겼던 오버헤드가 서서히 해체되고 있다. AI 필터링 덕분에 갈등의 텍스트가 순화되고, 소모적인 문서 작업의 짐이 사라지고 있다. 더욱 파괴적인 변화는 개인 능력이 AI로 증폭되면서, 과거 작은 팀 전체의 효율을 압도하는 "10X 엔지니어"가 실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AI가 기술 부채 해결이나 단순 구현을 전담하고, 인간은 오직 가장 중요한 '승인 게이트'만을 통제하게 될 것이다.

코드 품질이 상향 평준화되고 새로운 프로덕트 및 기능의 출시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지는 "Ship faster, AI fixes the rest"의 시대. 이제 우리는 매우 불편한 질문을 마주할 수 밖에없다. "1명이 10명분의 일을 할 수 있다면, 나머지 9명이 필요한가?"

각 회사가 가진 철학(혹은 "숨겨졌던 속내")에 따라 어떤 곳은 9명을 해고할 것이고, 어떤 곳은 10명을 그대로 유지하며 AI 도입을 통해 아웃풋을 10배로 증폭시킬 것이다. 분명한 것은 사람과 AI 에이전트가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팀이 새로운 노멀이 된다는 점이다. 기존에 출시 속도를 조절하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율하던 TPM 직군이나 매니저들 역시 "어떻게 실질적인 가치를 창출할 것인가"에 집중하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이 예측하지 못한 형태로 재편될 것이다.

동심원 3 "Making it Together": 플라이휠은 어디로?

세 번째 동심원 "Making it Together"는 개인, 팀, 프로덕트의 단위를 넘어 엔지니어링 리더십이 전반적인 생태계(Ecosystem)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할 것인가에 있다.

이 생태계의 성장을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전략이 바로 '플라이휠(Flywheel)'이다. 우리말로 가장 가까운 표현은 '선순환 구조'일 것이다. 하나의 서비스나 플랫폼이 의미 있는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성능 개선 및 기능 출시에 그치지 않고, 생태계 전체가 스스로 맞물려 돌아가는 이 거대한 선순환을 인식하고 그에 맞게 전략을 세워야 한다.

플랫폼의 선순환

플랫폼의 선순환

현존하는 가장 보편적인 컴퓨팅 플랫폼인 웹 브라우저나 모바일 운영체제를 예로 들어보자. 이 "생태계의 선순환"은 다음과 같은 궤적을 그린다. 브라우저 혹은 모바일 운영체제가 성능을 개선하고 새로운 기능을 제공하면, 파트너와 개발자들은 이를 활용해 더 뛰어난 앱과 서비스를 만들어낸다. 훌륭한 콘텐츠는 자연스럽게 더 많은 사용자를 생태계로 끌어들이고, 이렇게 늘어난 사용자 트래픽은 다시 플랫폼이 기술 혁신에 투자할 수 있는 강력한 원동력이 된다.

이렇듯 플랫폼이라는 거대한 구심점을 통해 개발자와 파트너, 그리고 사용자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모두가 윈윈(Win-Win)하며 파이를 키워나가는 아름다운 공생 관계. 이것이 많은 실리콘밸리 회사들이 믿어왔던 플랫폼 성장의 정석이었다.

하지만 영원히 돌아갈 것 같았던 이 플라이휠이 AI라는 거대한 충격파를 만나 요동치고 있다. HTML5, 그리고 모바일 앱 이후로 나름 건강하게 지속되어 온 컴퓨팅 플랫폼 생태계가 불안해보인다. 여러 구성원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던 기존의 밸류체인이, 이제는 "AI ➔ 사용자"라는 파괴적일 만큼 단순한 직통로로 급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붕괴 속에서 선순환의 허리를 받치던 파트너와 개발자들은 실존적 위기를 맞고 있다. 첫째, 비(非)엔지니어 사용자조차 특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맞춤형 일회용 도구(Jig)를 직접 생성해 쓰고 버리는 시대가 열렸다. 특정 기능으로 사람들의 삶을 편하게 해주던 수많은 크고작은 앱들, 그리고 B2B SaaS들이 경쟁력을 잃고 소멸 혹은 이합집산하고 있다.

둘째, 살아남은 앱과 서비스들조차 거대 AI 모델의 껍데기(Wrapper)로 전락하고 있다. 규모의 경제를 갖춘 슈퍼 앱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프론티어 AI의 추론 결과를 전달하는 단순 프론트엔드로 획일화될 위기에 처해 있다. 크고 작은 개발자들과 크리에이터들이 자생할 공간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이 단순히 '내 앱에 어떤 AI 기능을 추가할까'에 몰두할 때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딛고 서 있는 땅이 AI 시대에도 꺼지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인가?'를 냉철하게 묻고, 생태계 재편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동심원 4 "Making it Matter": 가치와 비전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생태계가 알 수 없는 속도로 재편되는 지금, 이 네 번째 동심원은 하나의 조직이 궁극적으로 세상에 기여하고자 하는 "가치(Value)와 비전(Vision)"을 다룬다.

과거 불확실성의 안갯속에서, 리더들이 제시하는 비전은 조직이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북극성이었다. "우리가 왜 이것을 만들고, 세상에 어떤 가치를 더하는가"를 상기시켜 비즈니스 목표와 코드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것이 그 핵심 역할이었다.

지금까지는 기술적 혁신과 기능적 우위가 대중을 위한 가치였다. 하지만 누구나 AI로 '기본 이상'의 프로덕트를 찍어내는 지금, 기능적 차이는 큰 의미를 잃어갈 것이다. 기발한 기능을 내놓아도 순식간에 아류작이 쏟아지거나 빅테크 혹은 프론티어 모델 회사들에게 흡수될 것이다. 앱과 서비스의 해자(Moat)가 허물어지는 이 기술적 평준화의 끝에 남는 유일한 차별점은 결국 '가치와 비전'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과거에는 조직 말단의 엔지니어에게 리더십의 비전이 깊이 와닿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1인 기업 형태가 일반화되는 지금, 보드룸(Boardroom)에서나 오가던 무거운 비전에 대한 논의가 엔지니어 개개인의 수준으로 내려왔다. AI가 실행 역량을 저렴하게 만들어주면서, 핵심 병목은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에서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선택하는 감각(Taste)'과 '실행에 옮기는 주도성(Agency)'으로 이동했다.

수많은 가짜 편리함 속에서 사람들이 진짜 가치 있다고 느끼는 지점을 짚어내는 직관력. 복잡한 시스템 전체를 조망하고 기술과 비즈니스의 교차점에서 판단을 내리는 '총체적 엔지니어(Holistic Engineer)'의 시대가 오고있다. 최근 스타트업 CEO들이 AI 기업의 개별 엔지니어로 합류하는 현상은, '엔지니어'와 '비전을 가진 1인 기업가'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확한 힌트다.

에필로그: 불안한 설렘

부서진 낡은 공식들

부서진 낡은 공식들

이 글은 혼돈의 AI 시대를 지나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을 위한 에세이다. 그렇기에 이 격변의 현장에서 느끼는 나의 혼란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 있을 것이다. 기존의 낡은 공식들을 예쁘게 포장하는 대신, 깨진 조각들을 발라내고 미래를 향한 4개의 동심원을 다시 그려보았다.

  • Making it Work (개인): 기술적 우수함과 디테일을 넘어선, '오너십'과 '주도성(Agency)'.
  • Making it Flow (팀): 사람과의 조율을 넘어선, AI 에이전트와의 '하이브리드 협업'.
  • Making it Together (생태계): 플랫폼의 격변을 직시하고 생존을 모색하는 '통찰력'.
  • Making it Matter (가치): 리더들의 전유물이었던 가치와 비전이 '1인 기업가 정신'으로.

구글에서 10년. 이제야 거대한 시스템을 웬만큼 이해했다고 자만하려던 찰나, 상상치도 못한 격변기가 내 멱살을 잡고 다시 출발선으로 끌어다 놓았다. 하지만 지난 기세와 에너지로 미지의 10년을 다시 달릴 수 있는 이유가 있다니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낡은 공식이 파괴된 종착점이자 거대한 질문이 시작되는 새로운 출발선, 그 스펙터클의 한가운데 불안한 설렘을 안고 서 있다.

이 포스트의 생각과 의견은 개인적인 견해이며, 제가 소속된 회사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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