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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 2026년 9월 29일 /

영향력에 대한 단상 2026

수년간의 회사 생활에서 건져낸 한 장의 스냅샷

#영향력 #리더십 #글쓰기

혼돈의 시간에 찾게 되는 사람

혼돈의 시간에 찾게 되는 사람

"팀 내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고 싶어요. 어떻게 하죠?"

커피챗이나 1:1 미팅에서 이 질문을 가끔 듣는다. 전형적인 짧고 깊은 질문, 길고 겉도는 대답 패턴으로 떨어지기 쉬운 주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영향력이라는 것을 정의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회사 생활 12년 차인 지금조차 내게 여전히 모호하고, 상황에 따라 그 의미와 깊이, 범위가 매번 달라지는 뜬구름 같다.

지금의 내게도 이럴진대, 하물며 과거의 나에게는 오죽했을까. 팀에 합류한 지 1~2년도 채 안 되어 되지도 않는 영어로 회의실 구석을 지키던 시절, 영향력은 수만 광년만큼이나 아득히 먼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내게 없던 무언가가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무언가'를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기에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다. 달라진 공기를 조금씩 느낄 수는 있었지만, 영향력이 대체 어떻게 자라나는지, 어떻게 해야 더 단단하게 키울 수 있는지 알 길은 없었다. 그저 '짬밥이 차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으로 치부했을 뿐이다.

정답을 쥐고 있다는 오만한 생각은 지금도,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한 가지는 커리어의 어느 위치에 서 있느냐에 따라 영향력의 의미는 계속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지금 이 순간 내가 포착한 "영향력에 대한 스냅샷"이다.

혼돈의 시간에 찾게 되는 사람

조직은 필연적으로 늘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 현재에 머물러 있어서는 결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와 함께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현상이 바로 혼돈과 불확실성이다. 지도도 없고 정답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최선을 찾아 가늠하며 헤쳐나가는 일은 모든 조직의 숙명이다.

혼돈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질 때,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자신의 지혜와 통찰을 나누고 조직의 지지를 얻어내어 구성원 모두를 전진시키는 일. 직함과 상관없이, 이것이 리더십의 본질이다.

그것은 단순히 주어진 태스크를 빠르게 쳐내는 전술적 실행력과는 결이 다르다. 눈앞의 타깃을 넘어 전체의 맥락과 벡터를 짚어내는 전략적 시야가 뒷받침될 때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설득력 있는 의견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이 한 번, 두 번 반복되기 시작하면 조직 안에서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갈피를 잡기 어려운 혼돈의 시간이 찾아왔을 때, 동료들은 "그 사람의 생각"을 찾아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저 사람의 의견은 반드시 들어봐야 해."라는 공감대와 함께 보이지 않는 신뢰가 조금씩 쌓여간다. 그 신뢰가 묵직한 덩어리가 되어 드러난 형태, 그것이 결국 우리가 느끼는 '영향력'의 실체다.

Read, Refine, Write, Repeat

그렇다면 그 신뢰를 만들어내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가?

풋풋했던 주니어 시절, 나는 엔지니어링 리더들을 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광경이 하나 있었다. 당장 눈앞의 업무로도 벅찬 상황에 독서 모임을 열고, 왜 그렇게 매일같이 장문의 글을 써대는지 의아했다. 나에게 그것은 현장의 치열함에서 한 발 빠진 한가한 취미나 뜬구름 잡는 일처럼 보였다.

꽤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지혜는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다른 각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관점에서 시작된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떠한 길을 지나 여기까지 왔으며, 앞으로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일이다.

물론 온몸으로 부딪쳐 깨지고 실패하며 배우는 방법도 있지만, 나 혼자 직접 겪을 수 있는 경험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 독서는 바로 이 한계를 깨뜨리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점화하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다. 책을 통해 지식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진짜 배움은 저자가 자신의 앵글을 입증하기 위해 어떤 논리를 세우고 증거들을 엮어냈는지 그 구조를 살펴보는 데 있다. 이 연마(Refinement)를 거쳐 아이디어가 관점으로 자라나는 모습을 보고 배우는 것이다.

잘 다듬어진 수석 같은 매끈한 글

잘 다듬어진 수석 같은 매끈한 글

그렇게 빚어낸 관점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형태로 완성하는 행위가 바로 글쓰기다.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생각의 흐름을 글로 쏟아내다 보면, "괜찮은데?"라고 착각했던 논리의 빈틈과 모순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글쓰기는 이 불순물과 군더더기들을 쳐내며 생각을 응축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쓰기의 본질은 타인과 나누는 데 있다. 잘 다듬어진 수석 같은 매끈한 글을 통해 나만의 관점을 사람들과 나눌 때, 비로소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 영향력이 태어난다.

크로미움(Chromium) 프로젝트의 '서로를 존중하는 코드 리뷰(Respectful Code Reviews)' 가이드가 좋은 예다. 기존의 컨트리뷰터들이 처음 프로젝트에 기여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향해 꼬집어내기 힘든 날선 기운을 드러내던 시절이 있었다. 이를 단번에 정리한 것은 경고 이메일이나 챗 스레드가 아니라, "동료의 역량과 선의를 먼저 신뢰하라(Assume competence & goodwill)"며 지켜야 할 예절의 기준선을 명문화한 글 한 편이었다. 엔지니어링 리더들이 작성한 이 가이드가 공개된 뒤 초심자 주위를 맴돌던 서늘한 공기는 점차 걷혀갔고, 경험의 길고 짧음을 떠나 서로를 존중하는 협업 방식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조직의 리더들이 왜 그렇게 책을 붙잡고 쉼 없이 글을 써댔는지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조직이 맞닥뜨린 혼돈과 불확실성 속에서 나침반이 되어줄 관점과 비전을 전파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읽고, 다듬고, 쓰는 이 순환에는 끝이 없다.

함정 1: 자기 확신의 덫

치열하게 생각하고, 관점을 쌓아가며, 글로 쏟아내는 여정은 스스로의 성장뿐 아니라 건강한 영향력을 넓혀가는 값진 과정이다. 하지만 이 길에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함정이 하나 도사리고 있다.

탄탄한 논리를 세우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을 촘촘히 쌓아 올리다 보면, 어느 순간 자기가 만든 성벽에 갇혀 자기 확신의 덫에 걸려들기 쉽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내가 긴 시간 동안 만들어 온 개발자를 위한 브라우저 기능(API)이 있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올린 나만의 설계 철학이 있었고, 그 철학은 나름의 단단한 논리 위에 서 있었다. 소수의 개발자들이 특정 부분에 대한 개선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지만, 내 설계가 옳다는 확신이 너무 강했기에 나는 그 목소리들을 외면했다. 외면당한 개발자들은 결국 플랫폼을 떠났고, 아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개발자가 떠나버린 API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API는 결국 개발자들을 위한 프로덕트이고,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내 아집이 만들어낸 실패를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꽤나 비싼 수업료를 치른 셈이다.

새로운 상황과 데이터가 눈앞에 주어졌을 때, 내 생각이 언제든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사고의 유연함'이 필요한 이유다. 진짜 리더십은 자기가 만든 성벽을 고수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새로운 목소리에 귀를 열고, 기존의 신념을 기꺼이 수정하며, 더 나은 방향으로 생각을 업데이트하는 '멈추지 않는 피드백 루프'를 돌릴 때 비로소 영향력은 지속 가능해진다.

함정 2: 숨은 아젠다

영향력을 갉아먹는 또 하나의 은밀하고 치명적인 함정이 있다. 바로 정치적인 계산이나 사적인 보상을 바라는 '숨은 아젠다'다.

주변 사람들을 밀어주고 끌어주며 더 나은 길로 이끄는 과정에서 무언가 반대급부를 기대하기 시작하면 생각의 결은 순식간에 뒤틀린다. 순수하게 팀을 바라보던 관점은 슬그머니 사욕과 정치적 셈법에 가려지고, 그로부터 나온 의견은 더 이상 "지혜"가 아니라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짜기 위한 "책략"으로 전락하고 만다.

사람들의 감각은 생각보다 훨씬 기민하고 정확하다. 처음 한두 번은 눈치채지 못할지 몰라도, 특정한 패턴이 반복되기 시작하면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저 사람에게는 무언가 숨은 아젠다가 있구나."

사심이 고개를 내미는 순간 신뢰의 탑은 단숨에 금이 간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탁월하고 백번 마땅한 의견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은 응답하지 않거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될 것이다. 어렵게 쌓아 올린 영향력은 물론, 평판에도 지울 수 없는 치명적인 오점이 남는다.

영향력의 완성은 결국 대가 없는 선의에 있다. 내가 이 의견으로 얻을 이익을 따지는 게 아니라, 오직 이 팀과 동료들이 불확실성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는 데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순수한 마음이다. 그 사심 없는 기여가 꾸준히 저축되어 갈 때 비로소 긍정적인 영향력이 조용히 자리 잡게 된다.

나가며

영향력은 결코 블로그 글 한 편으로 온전히 정의하거나 담아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고정된 공식도, 단계별로 정복할 수 있는 지침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밝혔듯, 이 글은 그저 지난 시간 동안 크고 작은 벽에 부딪히고 깨지는 과정에서 내가 건져 올린 지극히 개인적인 '현재의 스냅샷'에 불과하다. 되지도 않는 영어로 회의실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초년생 시절의 나와, 오늘 팀의 방향을 고민하며 이 글을 써 내려간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영향력의 모습이 전혀 다르듯이 말이다. 그리고 5년 뒤, 10년 뒤 내가 바라볼 영향력의 모습 역시 또 달라져 있을 것이다.

사고의 유연함은 이 글에도 예외가 아니다. 세상은 앞으로도 더 빠른 속도로 요동칠 것이고, 내가 오늘 정리한 이 생각들 역시 새로운 상황과 데이터 앞에서 언제든 수정되고 깨질 수 있음을 잘 안다. 그리고 나는 언제든 기꺼이 그 생각들을 부수고 다시 배울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두고 있다.

지금 서 있는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영향력의 의미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기록이 작은 실마리가 되었으면 한다.

이 포스트의 생각과 의견은 개인적인 견해이며, 제가 소속된 회사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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